나는 집에 와 샤워할 때까지도 너의 이름을 몰랐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굳이 서로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름을 알아야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 뒤, 이름을 물어보는 일. 그 사람은 이름으로가 아닌 사람으로 나에게 처음 와닿은 사람.
아직도 내 라이터에는 내 이름이 붙어있고, 내 손목은 허전하며 시간을 자꾸 확인하게 됩니다. 7시 이후에는 담배를 못 필 것만 같고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돌아가면 하얀 옷을 입은 환자들이 나를 반겨주고 어려우신 분들은 소지품 검사를 할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오전에 여러 치료 요법들을 할 것입니다. 행복한 결과물을 하나씩 손에 들고 각자의 ...
곤히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엄마가, 아까는 아팠다는 걸 안다. 힘 없는 목소리로 약도 못 넘기고 이도 저도 못 하며 늦게 오는 날 기다렸던 걸 안다. 그 순간에 나는 엄마 카드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겠지. "결제할게요" 라는 말 뒤에 따르는 죄책감들을 누군가는 알까. 어깨에 업고 아직까지 내려놓지 못 해 어깨가 아파오는 걸까. 어깨가 무거운 날은 유독...
18.06.18 계속되는 절망과 허망함 앞에 어느새 내 마음 곳곳에는 먼지가 찌들어 벗겨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같은 날, 양말 한 구석이 푹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면 나는 그저 우산을 던져버리고 온 비를 느끼고만 싶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내 마음을 씻겨줄 것만 같아서, 그냥 온 비를 느끼고만 싶다.
오늘 가 본 이문동은 10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마저 언니와 나를 키울 수 없던 시절, 우리는 몇 개월을 이 곳에서 친할머니와 머물렀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안경점에서 안경을 동경하기도 했었고, 안경점의 컴퓨터로 게임도 했었고, 그 옆의 헌 책방에서 옛 냄새들을 들이키며 책을 읽기도 했었다. 할머니의 미용실에 한참을 머무르며 손님...
모든 곳에 녹이 슬은 이문동. 친할머니는 오십삼년을 살았던 이문동을 뒤로 재개발 때문에 딸이 사는 대전으로 떠나게 되었다. 친할머니에게는 힘들게 낳아 키운 자식 셋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어 버렸다. 아들 둘과 남편을 병에게 차례로 잃고 남은 건 아직까지도 철이 없는 막내 딸 뿐, 건강 때문에 20살부터 하던 미용실을 접고 이제는 고향보다 더 친...
17년도 어느 밤 나도 평범하고 싶었다.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사랑 속에서, 잔잔한 호수 위의 배 하나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며 자라고 싶었다.나도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고 싶었다.친구들처럼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멀리 여행도 가고 싶었다.사고 싶은 옷도 마음껏 사고 좋은 신발을 신고 싶었다.그러나 내 여행지는 항상 꿈 속이었고...
18년도 초 옆 자리 할아버지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할아버지의 패션 센스에 걸맞는 고급 향수 향은 그가 두꺼운 갈색 가죽 가방에서 꺼낸 프랑스의 시라는 제목의 책과 어울렸다. 나는 그 옆에서 글을 썼고, 그는 내 글에 관심을 보였다. 나도 그가 읽는 시에 관심을 보였다. 할아버지는 시를 읽으면서 곁눈질로 내 공책을 훔쳐보고, 난 글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
나는 머리 위로 손을 곧게 뻗어 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물 방울들이 마치 여러 개의 손가락들이 나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누군가의 손가락들에 한참을 찔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래에는 샤워기 줄이 있었다. 병동 특성에 맞는 짧디 짧은 샤워기 줄. 나는 아주 천천히 화장실 바닥에 맨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샤워기...
분명 그제의 나는 열일곱이었는데, 까치발을 서니 하루가 지나 열여덟이 되어있었고, 어제의 열여덟의 냄새는 맡을 틈도 없이 사라져 나는 열아홉이란다. 내일의 나는 스무살이라는데 아니, 나는 열아홉을 좀 더 안고 싶어. 영원히 열아홉에 머물고 싶어.
18.05.13 열아홉이 되니까 시간이 정말 빨리 가요. 봐요, 난 어제 열여덟이었는데 벌써 열아홉 하고 오 개월이 더 지났대요. 이상해요. 어릴 때는 일 년이 정말 길었는데 지금 이런 걸 보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빠를까요? 아직 알고 싶은 세상이 많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이미 나는 지쳤는데 얼마나 더 힘들까요? 살수록 사는 게 무서워져요. 그런데...
햄스터들은 불만 끄면 어디론가 달리고 싶다는 듯이 쳇바퀴 위를 신경질적으로 달린다. 달려도 달려도 어차피 돌아와서 제자리일 뿐인데 열심히 달리는 걸 보면서 내 하루와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제자리다. 모든 것이 제자리. 물건들은 제자리에 놓지를 못 하면서 나는 왜 제자리인 걸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저 멍청한 나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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